탁월한 사유의 시선_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철학'이라는 말은 무게가 있다. 이 무게는 누군가를 주눅들게 만들 수도 있고, 누군가의 위신이 서게 만들 수 도 있고, 누군가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질리게도 한다. 누군가에게 무언가 해서 실이 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득이 될 것들을 꼽으라하면 역사 공부와 더불어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이 철학이다. 게다가 취업이든 입학이든 누군가를 대면할 면접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요구되는 것 중 으뜸으로 꼽는 것이 인문학이며, 이는 되풀이하면 철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이것을 즐기며, 공부하는 이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근묵자흑이라고, 내 스스로가 그런 것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듯 파고들면 불편함을 한가득 안겨주는 철학을, 막연함만이 가득하며 어려운 말만 가득해보이는 철학에 대해 친절히, 그리고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어휘로 그 실체를 만나게 해준 고마운 책을 오늘 리뷰하고자 한다. 


몇 년 전 부터, 인문학은 하나의 열풍이 된 것 같다. 독서에 문외한이었던 나 조차도 Steve Jobs의 Think Different 정도는 귓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을 정도로. 학생일때 듣던 어느 취업 강의에서 인문학적인 사고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늬앙스였다. "여러분이 어느 자동차 대기업의 면접장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됩니다. '임진왜란과 한국 자동차 시장이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이 때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난감했다. 임진왜란과 우리나라 자동차시장이라니. 상상도 못할 조합이다. 그러나 이내 그 강사는 설득력있는 어조와 논리정연한 말로 이를 엮어냈다. 겉으로 보이는 쌩뚱 맞은 두 단어를 그의 시선으로 엮어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나는 당시 그 수업에 대해 '인문학적 사고마저도 공장에서 물건을 찍듯 주입시켜버리는 구먼'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그 전개에 대해서만큼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21세기북스, 디자인 씨디자인


 저자는 말한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선 자신을 지성적으로 튼튼하게 하는 일입니다. 모든 철학적 자산은 독립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철학을 통해 자신이 튼튼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은 '높은 시선'입니다. 높은 차원의 활동성입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튼튼해진 그 사람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고 새로운 빛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에 진실한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아마 그 강사는 철학적으로 튼튼한 사람이었나보다. 그는 자신만의 '높은 시선'으로 임진왜란과 자동차 시장을 엮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높은 시선'은 어떤 것일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일상의 잡다함이나 자질구레함 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결정하고 지배할 더 높고 큰 단계에서의 결정을 감행할 수 있는 높이가 바로 철학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의 잡다함과 자질구레함은 무엇인가. 아마 평소에 마주치는 평범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오늘은 무엇을 입고 나가지?' '오늘도 야근인가?' 등등 의식하지 않아도 절로 떠올리는 생각들이 일상의 잡다함인것 같다. 


허나 가끔은 답답하기도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생각도 들기 마련이다. 가령 '지금 내가 하는 이 업은 내가 평생을 바쳐 쌓을만한 것인가?' '나는 어떤 태도를 견지하며 삶을 살아내야 할까?' '내 삶의 사명과 비전은 무엇일까?' '나의 취향은 무엇인가?' 같이 말이다. 책상 앞에 앉아 이런 생각에 잠길 때면 답답함이 차오르고 엉덩이가 들썩거리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들이 '일상을 결정하고 재배할 더 높고 큰 단계의 생각'이라 믿는다. 


이런 단계의 생각들은 그에 걸맞는 시선에서 보다 명확히 그 답을 만들 수 있다. 이는 아무 재료도 넣지 않고 맷돌을 돌리면 돌가루만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응당 맷돌을 돌리기 전에 콩을 넣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콩을 책이라 믿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통해 만난 보다 높은 시선의 소유자들의 것을 내 삶에 '적용했다.' 아니 그저 '따랐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그 '따름'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6시를 두 번 보는 사람이 성공한다', '꿈을 종이에 적으면 이루어진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라' 등등. 더불어 이러한 '따름'과 내 현실에 괴리가 생길 때, 나는 자책하곤 했다. 아무리 좋은 책이더라도 이는 단지 자양강장제 처럼 내 삶에 일시적인 활력을 주었을 뿐이였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인가 보다. 이 책을 만났으니 말이다. 저자는 이런말을 한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앞선 철학자처럼 살아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철학자가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인 이론을 남길때 사용했던 바로 그 높이의 시선을 자기도 한번 사용해보는 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장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으면, 장자처럼 사는 일을 꿈꾸기보다 오히려 자신도 장자가 사용했던 높이의 시선을 지금 자신의 시대에서 사용해보려고 덤빌 일입니다.

철학적 지식을 갖는 일과 철학적 시선을 발휘하는 일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철학적인 지식에 익숙해지는 단계를 넘어서서 스스로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입니다. 지성이 한 발짝 한 발짝 상승해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아도 되는 그곳, 거기에 철학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한 단계가 부족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단지 책의 내용을 내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은 스스로 주도성을 포기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의 생각과 시선을 내 삶에 투영해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 현재의 나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시선과 사유의 개인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향들이 하나로 모여 개인의 사명과 비전, 그리고 삶의 태도가 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단 책 뿐이랴, 예술과 박물관에서 또한 우리는 높은 시선을 활용 할 수 있다. 앞서 저자는 책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인문에 대해 이렇게 정의 했다. 

'인문'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입니다. 인간의 활동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개괄해 파악한 것이죠. 인간이 구축한 문명이란 모두 인간의 동선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나의 경우에는 순수한 즐거움보다 필요성에 의해 전시회나 박물관을 찾아가곤 한다. 비록 지금은 이것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즐기다보면 언젠가 안목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어쩌면 인스타그램의 한 장을 채우기위해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까 나는 아직도 순수히 그것들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 내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슨트'를 듣거나, 예술가의 직접적인 설명이 깃들 때 뿐이다. 저자도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한다. 

저는 박물관이나 갤러리 가는 것을 그리 즐기지 못했습니다. 가서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니까요. 왜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박물관이나 갤러리가 발산하는 높이의 시선에 내 시선이 일치하지 못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무엇을 즐긴다는 것은 그것이 발산하는 가치의 높이와 자신의 시선이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박물관에 갔을 때 사람들의 감상법은 대개 이렇습니다. "야, 이 유물 참 좋다. 옛날 사람이 어떻게 이걸 만들었을까?" "이건 지금 사용해도 될 정도네." 이렇게 감상을 합니다. 그런데 박물관이라는 것 그 자체가 갖는 높이의 시선을 포착하고 거기서 재미를 느낄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유물들 하나하나에 시선이 머무르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유물들 하나하나를 보고 감탄하면서, 종국에는 그 유물들 하나하나를 가능하게 한 그 시대 그 문화권 사람들의 동선을 읽습니다. 그것을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곳이 바로 '인문'이라는 영역이 자리하 는 곳이며 인간의 동선, 인간이 그리는 무늬가 보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나를 충격에 빠뜨렸던 저자의 말은

유물들 하나하나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지만 그 유물들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동선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읽혀질 수 있을 뿐이지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 이것 때문에 인간은 특별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탁월함을 잉태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경외감이 들었다. 적어도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 낼 수 있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를 이유로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을 존경하고 친하게 지내왔었는데, 위의 이유 때문이 아닐지 싶다. 


이렇게 자신의 '높은 시선'을 갈고 닦다 보면 방향성이 생기고, 이러한 방향성이 모여 개인이 그리는 동선, 즉 '나의 인문학'이 생기게 된다. 이를 다른 표현으론 '꿈'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이며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며, 꿈은 개인의 영역에서 '철학적인' 삶을 살 때 얻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철학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는 것'이라 말한다. 기존의 틀로 나를 재단하는 것이 아닌, 익숙한 것과의 결별하는 독립적인 자세로 자신의 삶을 정의 하는 것을 철학이라 말한다. 이는 자신의 '독특함'을 만든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을 근거로 자기 삶을 꾸리면 자기주도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독특함 보다는 일반적인 것, 누구나 다 공유하는 것을 통해 자기 삶을 결정하게 되면 이는 자신이 자기 삶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리는 셈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 포스팅에 옮기는 나의 기쁨과 깨달음은 3할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많고 깊었다. 나의 글의 수준이 저자의 시선을 쫓기엔 역부족이기도 하며 짧은 책 한권에 압축된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면서도 모두 연결이 되어있어, 내가 느낀 모든 것을 나누면 이 포스팅이 정말 길어지기 때문에 정말 나누고 싶은 것만 옮기게 되었다.


내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던, 정체모를 불안을, 갈망하던 사유의 태도를, 대면하기 힘들었던 철학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준 이 책을 보다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   


1AN

Minima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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