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여러 행동들 중 가장 어려운 것은 보는 것과 듣는 것이라 한다.

특히 보는 것이 더욱 그러한데, 그 이유는 무언가를 본다면 우리가 변하기 때문이다.

드 멜로 신부의 말을 인용하면,

 

우리는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본다면 우리가 변할 테니까, 

우리는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본다면 퍽 불확실하게 붙들고 있는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테니까.

그래서 깨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한 가지는 힘이 아닙니다. 

체력이나 젊음이나. 혹은 심지어 대단한 지력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한 가지는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깨어날 기회들은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의 양에 정비례합니다. 

여러분은 받아들일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습니까?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서슴없이 부수어 버릴 각오가 얼마나 되어 있습니까?

낯선 것에 대해 생각해볼 태세가 얼마나 되어 있습니까?

-깨어나십시오 p46-

 

여러 선인들과 구루들은 본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종종 보게된다. 

다만 이제껏 내가 접한 개념은 봄에 있어 평소에 무신경하게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경이를 느끼는 것을 권유했던 조이다.

 

돌아보건데, 며칠 전에 썼던 에세이 (https://1ans.tistory.com/69)에서 위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평소 존경하고 흠모하던 친구인 수진이와의 이야기 중, 문득 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의 대화는 깨어남의 기회였을까. 

분명한 것은 그 대화 이후의 내 삶에 대한 스탠스가 바뀌었는데, 

이 역시 돌아보면 참 우습게도, 절대적으로 따르리라 굳게 다짐하던 생활양식이 단 몇 시간 만의 대화로 바뀌어 버린것이다.

 

이처럼 삶은 한 가지 철학이나 공식에 담아두기엔 거대한 것이기에, 

새로운 깨달음이나 라이프스타일을 발견하고 따르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이내 그에 반하는 것이 나타나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러한 과정들, 즉 정립하고 깨지고 찾고 다시 정립하는 일련의 프로세스들이 바로 삶의 흐름에 따라 춤추는 것이 아닐지.

그래서 삶이 경이롭지만 한편으론 즐겁다.

나의 일상이라는 도화지에 여러가지 삶의 태도를 그려보고 지우고 그리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우리는 보아야 한다.

그것을 상으로 떠올려 ‘보’든

피사체를 앞에 두고 ‘보’든

보는 행위가 전제 되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

다양한 개념과 사상 아이디어를 보고, 그 중 구미가 당기는 것을 내 삶에 그려보자.

설사 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다른 그림을 새로운 도화지 위에 그리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1AN

Minima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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