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한 이해 _

초연함이라는 주제를 접했다. 

우리는 애착에 예속되어있고, 이러한 애착들을 고수하기 위해 세상을 재정립하려 한다는 이야기다. 

그 일례로 든 상황이 무척 흥미로웠다.

‘내가 이 다른 사람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 자신이 매력적이도록 해야지’
그이 또는 그녀의 사랑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누군가가 나를 세뇌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다른 사람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죠. 
현실과 접촉할 필요가 있을 뿐이죠. 
나의 이 감옥을, 이 설계화를, 이 조건화를, 이 그릇된 신념들을, 이 환상들을 부수고 나올 필요가 있는 겁니다. 

불현듯 나의 감옥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든다. 

현실을, 세상을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 바라보아야 하건대,

나의 그릇된 신념과 스스로 가둔 감옥의 창살 사이를 통해 왜곡하여 받아들인 것은 아닐지. 

너는 너이지만 나는 너를 온전한 너로 보지 못했고, 

그것은 그것이지만 편향된 그것으로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니였을지.

전심으로 원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환상일 수도 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워라밸이건, 

연인이건,

가족이건,

그 무엇이든, 이러한 애착의 대상들은 시간이 흐르며 변화하기 때문에,

환상에서 깨어나 도리어 그것이 없는 상태가 행복임을 자각하고자 한다.

 

행복은 바로 지금이다.

우리는 행복에 둘러싸여 있다.

다만 나의 편향과 스스로 가둔 감옥으로 말미암아 행복과 단절된 것일지도 모른다.

정서적으로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홀가분한 일인가.

오롯이 세상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그 순간이 나의 감옥을 부술 때이다.

애착과 집착을 비우고, 세상의 모든 생명과 사람들에게 민감한 것이 이해이자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라도 혹은 무엇에게라도 모질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의 편향을 자각하고 이 세상에 민감해짐을 의식적으로 이루어보겠다.

 

 

 

1AN

Minima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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