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19
일주일 전 즈음에 무릎에 큰 부상이 생겨 수술을 받았다.
비록 완쾌되더라도, 습관적으로 무릎이 다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큰 고통을 느꼈을 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회사 걱정이었다.
'할 일이 많은데, 수술을 받게 되면 그 공백을 어찌 채울까..'
두려움이 다가왔다. 처리해야 할 현안들이 눈 앞에 아른 거리기도 했다.
문득 깨달은 점이 있다면, 그 순간의 무수한 생각들 중에서 나에 대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너무 분했다. 나는 뒷전으로, 일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일이 좋아서라기 보다 이 일을 제 때 하지 못함으로 오는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삶에서 무엇이 먼저인지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되었다.
보통 일이 익숙해져 갈 즈음, 일은 하나의 습관으로 내 삶에 녹아든다.
그리고 이 녹아든 습관은 더 이상 외부의 낮선 것이 아닌 내 자신이 된다.
이는 마치 한병철 작가의 피로사회에서 비춘 바이러스와 면역체의 관계를 떠올리게한다.
"감기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투하면 면역체가 즉시 반응을 일으켜, 이 병균과 대항하지만, 지방은 어떤 면역반응도 일으키지 않아 비만을 유발하고, 우리 몸을 해롭게 한다."
마찬가지로, 내 자신이 된 일에서 발생한 어떤 것, 심지어 내 삶에 해로운 것일지라도 나는 면역 반응을 일으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써 이미 자연스럽운 내 삶이 되버렸기 때문에.
잠들기 전에, 다가올 내일이 무서운 것은 정상일까.
자는 와중에도 풀리지 않는 일 때문에 잠에서 깨는 것이 정상일까.
출근할 때, 오늘의 일에 대한 근심을 한 가득 가져가는 것이 정상일까.
사람사이의 관계는 평등하다고 하지만, 고객을 상대할 때의 불평등함에서 찾아오는 부정적인 기운을 긍정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것도 정상일까.
수술 이후 4일 간 입원하여 요양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일은 더 이상 나의 습관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내 삶의 면역체 같은 것이 위의 사항들과 면역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 같다. 이 앞의 글들, '두서없는 1~7'을 관통하는 큰 주제는 '알 수 없는 공허함' 이였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이 공허함의 근원을 찾고자 노력을 기울였고, 몇가지 추측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 공허함의 근원은 내가 자각하지 못한, 일에서 오는 속앓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 일에 대한 기준을 하나 즈음은 성찰했다.
"적어도 내가 통제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고객이 나를 추궁 할 수 없는 일"
그리고 그 일로 떠오르는, 준비 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이 떠오른다.
이 상황에 대해 부모님과 상의했을 때 부모님은 시간을 두고 더 지켜보자고 하셨다.
그러한 불합리함을 견디어 내는 것이 사회고, 그정도는 버텨내어야 한다고.
행여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일단 시작 할 준비를 갖추어 두고 행동에 옮기라고.
그래서 결심했다.
그 준비를 하기로. 그리고 이제는 나를 위해 일을 하는 것으로.
하지만 답답하기도 했다.
견디어 내는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성인으로써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인것 처럼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
견디어내기 어려울 때 피하는 것은 내가 성인으로써 실패한 것처럼 여기어 지는 것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