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에 집중하기

아침에 내 방에 있는 컴퓨터를 치웠다.

서른네 살인 요즘에 내 자유시간을 가상세계에 의미 없이 쏟아붓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컴퓨터는 내 사무실에 있지 않는 이상, 나의 습관회로에 따라 가상세계로 진입하는 도구가 된다.

가상세계란 무엇인가.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주제나 인물, 사건들에 대해 관심을 쏟는 집단의 일원이 되는 공간이다.

이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나의 자발성과 능동성, 집중력이 계발되기는커녕 퇴화되고 있으며 반대로 수동성과 산만함, 그리고 현생에 하잘 도움 될 것 없는 것들에 나의 에너지를 쏟게 되기 때문이다.

즉, 나의 자립과 독립성 그리고 정신이 오염되는 느낌을 받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가상 세계는 여러 형태로 나에게 나타난다.

첫 번 째로, 커뮤니티이다.

이러한 사이트들은 편향된 시각을 갖고 그 기조와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비판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눠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비전과 시각을 갖게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젠더 갈등일 것이다.

더불어 나의 사고력이 마비된다. 단지 의견을 수용하기만 하는 거수기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상태가 어찌 보면 상당히 편안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나의 정신과 신체는 이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의미 없는 게시판을 계속 새로 고침 하여 새로운 이슈가 생겼나를 실시간으로 체크하게 된다.

특히 잘 나가는 사람들, 소위 인플루언서들에 대한 게시글들은 그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이성과의 열애설, 그들의 재산,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렇지 못하고 있는 나와 비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무기력감으로 치환되어 나의 동기를 꺾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이어지는 두 번 째 형태는 바로 인터넷 방송이다.

인터넷 방송은 소속감과 더불어 새로운 이슈와 자극, 그리고 채팅이라는 형식으로 능동적 참여가 가능한 플랫폼이다.

갈증을 느끼던 사회적 활동을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현생에 일말의 도움이 되느냐 라는 반문에는 쉬이 답할 수 없다. 그것을 보면 나에게 어떠한 이득이 오는 것인가. 전혀 없다. 이를 보고 누구와 토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십거리조차 이야기할 상대를 찾기가 어렵다. 커뮤니티에 가야 비로소 같은 주제로 공감하고 이야기할 거리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역시 가상세계의 일일 뿐이다. 현생에의 인간관계는 더 소홀해질 뿐이다.

맹목적으로 비제이, 스트리머들의 행태를 좇을 뿐이다.

그들의 현생이 우리에게 오락거리가 된다. 우리가 오락거리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현생에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생 자체가 오락거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현생에 불어 넣기 위해선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모임에 참여하거나 새로운 능력을 계발하는 등, 즐거움이 없던 현생과의 이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큰 의지가 필요하다.

그전에 현생에 대한 불만조차 인지하기 어렵다. 어렴풋한 공허함으로 느낄 뿐이다.

결국 만족할 수 없는 현생을 자위하기 위해 인터넷 방송인들의 현생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를 그들에 동일시하는 것이다. 가지지 못할 재물과 인기 그리고 외형 혹은 내면적인 것들도 모두. 환상 속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를 그들에 대입하며.

세 번째 형태는 웹소설과 웹툰이다.

흔히 킬링타임용이라 말하는 것이다. 주로 현판, 판타지, 무협, 로판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태의 저작물들이다.

중학생 때 부터, 이러한 가상의 세계에 몰두했던 경험이 있다.

주인공에 나를 대입시켜 정신적으로 가상의 세계에 접속하게 된다.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한다. 그리고 모험의 세계에 빠져든다.

무언가에 빠져드는 것에 대입할 두 단어가 있다. 바로 몰입과 중독이다.

몰입과 중독을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행동의 결과물이 나에게 귀속되는가 아니냐로 판단할 것 같다.

열중하여 무언가를 함에 있어 나에게 남는 것이 있다면 몰입이다.

그러나 열중의 결과로 생긴 부속물이 나에게 속하지 않거나, 심지어 해롭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중독이라 생각한다.

가상세계를 소비하는 것은 나에게 귀속되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중독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가상세계를 내 삶에서 비우고 남은 그 자리에 몰두하여 생산물이 나에게 귀속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떨까.

사실 이 개념은 에리히프롬의 저작인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생산성있는 행동의 정의를 위와 같이 표현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내 행동에 나의 지성과 감정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정도를 행위의 질로 표현했고,

남는 결과물을 행위의 양으로 표현했다.

그러고선 행위의 질이 양보다 우선하는 행동을 하도록 독려했다.

생계를 위해 억지로 하는 일은 나에게 남는 것은 있으나, 정신과 육체의 능동적인 참여는 기대하기 어렵다. 하루의 대부분을 생계의 영역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이다.)

남는 것은 없으나 정신과 육체의 능동적인 참여가 가능한 일도 있다. 바로 취미의 영역이다.

이는 가상세계의 중독과는 구분된다.

중독에 관련된 일들은 정신과 육체의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 없이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독에 관련된 일들은 불행의 영역이다. 수동적이며 얻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제일 기피해야 할 행동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능동성을 담보로 하며, 동시에 부산물이 나에게 귀속되는 행동들. 이것들은 행운의 영역에 속해 있다. 그리고 모두가 이 곳에 자신의 포지션을 놓길 원한다.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바로 행운의 영역에 들기란 어려운 일.

취미의 영역을 행운의 영역으로 끌어오거나, (돈이 되게 함으로써)

생계의 영역을 행운으로 끌어오는 수밖에 없다. (열과 성을 다함으로써)

둘 다 해보려고 한다.

도움 되는 취미활동에 전문성을 더하고,

전문성이 있는 일에 애정을 가져보는 것이다.

1AN

Minima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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