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 - 설레임


다섯시 기상을 계획하였지만, 

결국 6시 반에 눈을 떳다. 

요가의 통증은 온몬에 남았지만 일단 이전보다 일찍 일어난 것에 감사할 나름이다. 

어젯밤은 소음과 선잠의 연속이었다. 

일부러 시계를 보진 않았지만 아마 예상한 시간보다 늦게 잠들었을 것이다. 


아침으로는 터이거너츠를 먹고 있다. 

현 80kg에 가까운 무게를 어떻게든 줄이고자 한다. 

일단은 식이요법이다.


늦은 일정에 차선책인 일찍 출근하기를 실행했다. 

현재 시간은 7:55분. 

이제 집을 나설 시간이지만, 오늘 만큼은 회사에 와 이글을 쓰고 있다. 

For the better life.


설레임은 어떻게 나를 찾아 오는 것일까?

설레임은 왜 불현듯 나타나는 것일까?

그리고 애타게 만드는 그 누군가를 만났다면, 

왜 모든 신경은 그 사람을 향해 곤두서는 것일까?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다 어느 사이에 이 감정은 가라 앉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을 다시 이어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평온함을 바라지만 깊던 얇던 나의 감정선은 꾸준히 맥동하고 있다.


이 글은 그저 생각이 흐르는 대로, 

영사기로 영화를 스크린에 투영시키듯이, 

이 곳에 투영 하는 것이다. 

이는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감추고 싶은 속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약간의 배덕감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인스타그램에 음식 사진과 셀카, 그리고 풍경사진을 올리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그저 아름다움을, 행복함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레임은 아무나 줄 수 없지만 다시 또 누구나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것 같다.

어떤 특정한 조건이 성립되면 수학 문제를 풀듯 설레임에 도달하게 할 수 있는 공식이라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다는 아들러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콧대가 높다는 말을 떠올려본다. 

가끔 자아도취에 빠져 피노키오 처럼 길어진 코 끝을 느끼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마주치는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 볼 때 느끼는 부담을 왜 다른 이에게선 느끼지 못 할까? 

시선 둘 곳을 모르던 나의 눈길은 왜 그녀가 지나가면 제 자리를 찾는 것일까?


삶의 작은 사건 하나 하나를 들여다 보는 일은 즐겁다.

나의 바인더 안에 꼿혀 있던 중국 돈은 수시로 흘러내려 나를 귀찮게 한다.

다시금 집어 넣어도 성가시기는 마찬가지이다. 

물건은 제 역할이 있고, 

'수첩에 꽃혀 있음'은 돈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확히 밤 11시. 

요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 이루지 못한 5시 기상을 내일로 당겨보자.

일찍 일어나 이글을 마무리 짓자.


다음날의 오후 4시 20분이다.

일찍 일어나기는 오늘도 미뤘다.

겨우 눈을 떠 보니 시계는 7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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