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 한병철

독서를 처음 시작할 때,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 부터 부정성을 타파하고 긍정성을 독려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이끌리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같이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절친 두 명에게 독서와 자기계발 교육을 추천하고 같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달 뒤 한 친구는 무분별한 긍정을 강요하는 자기계발서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 친구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을 읽고 생각을 굳혔다고 했다. 


피로사회는 김종원 저자의 '사색이 자본이다'에서 처음 그 존재를 알았다. 김종원 교수가 너무 강렬하게 추천을 한 책이기에 중고로 구매해보려했지만 중고매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은 책이었다. 두 번째로 나에게 존재감을 알린 것은 나의 절친인 민찬형이 이 책을 권했기 때문이다. 120페이지 가량의 얇은 책에서 아주 깊은 사색이 담겨있는 추천사와 함께.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디자인 이경진


저자는 긍정의 과잉성으로 부터, 현대사회의 시스템적인 폭력으로 부터 우울증이 온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태껏 우울증과 같은 병세를 어떠한 부정성에서 부터 찾아오는 면역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부터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보았을 때, 전율이 돋았다. 저자는 이를 비만에 비유한다. 예컨데, 감기 바이러스는 몸에 침투하는 즉시 우리 몸의 면역반응을 일으키지만, 지방은 어떤 면역반응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는 비만을 유발한다. 그리고 비만은 우리 몸을 해롭게 한다. 


내가 읽어왔던 수 많은 책들은 나에게 긍정을 요구했다. 성공하기 위해, 성과를 내기위해 계속 긍정을 채우고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 믿으면 다 이루어 진다는 맥락의 책들이었다. 미니멀라이프를 표방함에 있어서, 나는 긍정성에 함몰되어 있지 않은지 생각해본다. 과함을 경계하는 태도의 삶에서 긍정은 내가 지각하지 못한 채 그 과함을 넘겨버린것은 아닐까.


저자는 사색의 힘을 강조했다.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오히려 퇴보라고 주장한다. 그는 야생의 동물에 비유한다. 먹이를 먹으면서, 짝짓기를 하는 상태에서 조차 그들은 생존을 위해 다가오는 적을 감시해야 한다. 이는 곧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는 말과 통한다. 나역시 이 대목에서 뜨끔했다. 같은 시간내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신경을 분산 시키고, 그런 기법들을 배우기 위해 또 다른 시간과 돈을 썼기 때문이다.


저자는 심심함을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라고 했다. 심심함은 어떤 새로움의 출발과도 같다. 그러나 나는 심심한 것에 대한 참을성이 없기때문에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새로운 자극을 좇았다. 절제하며 살겠다는 미니멀라이프를 표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심심함은 사색을 가져온다고 한다. 그리고 사색은 경청의 자세의 밑바탕이다. 내 큰 고민 중의 하나인 '경청의 자세'는 바로 심심함을 수용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면 나는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하지 않았다.


저자는 사색적 삶은 부정성을 전제로 한다고 했다. 분노와 머뭇거림은 잠시 멈추어 나의 행동을 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크게 공감했다. 가슴속에 치밀어오르는 의심과 분노를 묻어두며 '그저 잘 풀릴거야'라는 주문을 외며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마무리 지으려했던 마지막 일터에서 나는 분노를 토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내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지만, 이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나는 어쩌면 이 때, 무한긍정이라는 성벽에 균열을 낸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나에게 부정성의 필요성과 성과주의 사회의 압박으로 부터 벗어날 생각의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긍정의 자기계발서와의 결별을 선언한 내 친구의 입장도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자기계발서건 긍정이건 가리지 않고 읽겠지만 하나의 필터가 생겨났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Book Archive (피로사회)


지방은 어떤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다. 면역학적 저항은 언제나 강조적 의미에서 낯설다고 할 수 있는 상대, 이질적인 상대를 향해 일어난다. 같은 것은 항체의 형성을 초래하지 않는다. 같은 것에 지배되는 시스템 속에서 저항력을 강화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는 면역학적 배척과 그렇지 않은 배척을 구별해야 한다. 비면역학적 배척은 같은 것의 과다, 긍정성의 과잉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부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사응로 규정한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배경의 사태도 계속 정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멀티 태스킹뿐만 아니라 컴퓨터게임과 같은 활동 역시 야생동물의 경계 태세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주의구조, 넓지만 평면적인 주의구조를 생산한다. 최근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 더 활동적으로 된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 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 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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